필리핀 공산당(CPP) 중앙위원회와 신인민군 전국작전지휘부는 신인민군의 대변인이었던 카 오리스(조지 마드리스) 동지에게 최고의 헌사를 보내는 동시에 강고하게 붉은 경의를 표한다. 카 오리스는 2021년 10월 29일, 그의 의료보좌인 카 피카와 함께 의학적 치료와 정기검진을 위해 이동하던 중 살해되었다. 향년 72세의 나이였다.

당 전체, 모든 혁명적 군대, 혁명운동의 동료들은 카 오리스의 죽음에 깊은 슬픔에 빠졌다. 당과 신인민군, 전체 혁명 운동은 핵심 간부이자 지도자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적들은 카 오리스의 죽음을 축하할 뿐 그들에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사망하기 오래 전부터 카 오리스는 수천명의 후배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을 발전시키고 훈련시켰다. 그의 순교는 현 세대와 다음 세대를 더욱 고무시켜 장기적인 인민전쟁을 통해 민중민주혁명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중앙위원회는 카 오리스의 아내인 카 마리아 말라야와 그들의 자녀들뿐 아니라 카 피카의 가족과 동료들에게 깊은 애도을 표한다. 필리핀 민중은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상당한 슬픔에 빠져있다. 그가 혁명을 위해 복무했던 5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카 오리스가 개인적으로 마주쳤던 수많은 농민들과 루마드족 민중들은 카오리스의 죽음에 깊은 상실감을 느낌과 동시에 그가 어떻게 비겁하고 가증스러운 파시스트들에 의해 살해되었는지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우리는 카 오리스와 카 피카를 살해한 뒤 그들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군 간부들을 통해 거짓말을 설파한 필리핀 정부군, 특히 제4 보병사단을 강경한 어조로 규탄한다. 카 오리스와 그의 보좌는 자전거를 타고 부키드논주 임파수공 지역의 중심가에서 국도로 진입하던 중 매복해 있던 403보병여단 소속 군인들에게 습격당했다.

두 사람 모두 무장 상태가 아니었고 전투를 벌일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필리핀 정부군은 그들을 손쉽게 체포할 수 있었다. 대신에 이 파시스트들은 그들의 비겁함을 보여주는 한편 파렴치함을 입증하듯 카 오리스와 카 피카를 몇발의 총성을 통해 끝장냈다. 무방비 상태의 적을 살해하는 것이야말로 전혀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카 오리스가 정부군과 NPA 부대와의 무력충돌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주장은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근처 산지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수백만건의 공습이 뒷받침할 수 있듯 엄청난 거짓말에 불과하다.

우리는 카 오리스를 살해하라는 음모는 독재자가 직접 지시한 것임을 알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카 오리스를 살해하라는 최종 명령은 다름아닌 로드리고 두테르테에 의해 내려졌다. 두테르테는 지도부들을 살해함으로써 혁명을 종식시킬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에 사로잡혀 당과 신인민군의 지도자들을 살해하는데 집착하고 있다. 반면에 카 오리스가 흘렸던 피는 애국자, 민주주의자 그리고 혁명가들이 움트고 뿌리내리는 토대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카 오리스는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파시스트들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영웅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카 오리스는 공산주의자들의 참된 지도자이자 전사였다. 5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는 제국주의, 봉건주의 그리고 관료자본주의의 굴레로부터 억압받고 착취받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그리고 흔들림없이 바쳤다.

그는 1970년대 초 젊은 학생활동가로서 사회운동과 민주주의에 이끌려, 가난과 빈곤에 허덕이는 대중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해왔다. 카 오리스는 부키드논주 마라마그 지역에 위치한 센트럴 민다나오 대학 무수안 캠퍼스에서 학생 동지들을 조직하는 일을 함께했다. 1972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 그는 농업공학과 학생으로서 다섯번째 해를 맞는 시기였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치 로, 자유농민연맹과 같은 단체에서 활동했다. 카 오리스는 1974년에 체포되어 1976년까지 구금되었다. 계엄령 하에서 이루어진 파시스트들의 탄압은 무장혁명에 함께하기로 한 그의 결정을 실현시켰다. 석방된 이후에는, 그는 곧장 지역으로 향했다.

카 오리스는 청년 시기에 신인민군에 입대했고 민다나오, 특히 북부 민다나오 지역에서 결성된 붉은 전사들의 제1 분대에 소속되었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신인민군의 성장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신인민군은 대중투쟁, 무력투쟁, 반봉건투쟁을 벌이면서 몇 개의 분대에서 여러 중대로 규모가 커졌다. 신인민군은 농민 계층과 루마드족(소수민족)의 이익에 복무하며 싸웠고 주정부의 무장 요원들과 농장과 조상의 땅까지 빼앗은 대규모 상업농장, 대형 벌목, 광산 자본 기업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했다.

카 오리스는 장기적 인민전쟁을 통해 당의 민중민주혁명 노선을 실행에 옮겼고 그 정확성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렇게 당과 신인민군은 지역에 넓고 깊은 뿌리를 내렸다. 무수하게 많은 형태의 혁명적 대중조직들이 생겨났고 이는 곧 마을 차원의 경제, 정치, 교육, 문화, 군사 문제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정치권력의 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토대가 되었다. 파시스트들의 탄압 위협에도 불구하고 수천명의 사람들이 인민전쟁에 동참하기 위해 당에 가입했다.

카 오리스는 1987년, 코라손 아키노 정부와의 평화회담이 결렬된 뒤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5년간 수감되었다. 이 기간 동안 민다나오에 주둔하고 있던 신인민군은 너무 이른 조직화와 반란주의가 가져온 오류가 정점에 달했고 신인민군의 붉은전사들은 불균형적인 대대에 상당히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는 결국 조직의 수평적인 확대와 대중적 기지의 확장과 유지에 해악을 끼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군사적 승리를 이어 나가는데 있어 대중적 지지가 위축되고 부족해지고 말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는 1992년 중앙위원회가 장기적 인민전쟁을 통한 민중민주혁명의 전략적 노선과 당의 기본 맑스주의-레닌주의-마오주의 이념 원칙을 재확인하고자 선언된 제2차 대 정풍운동의 가장 강력한 축 가운데 하나였다. 카 오리스는 수정주의자들과 민다나오 위원회의 전직 간부이자 혁명적 대의에 의해 반역자가 되었던 일부 '좌파' 기회주의자들에게 대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걸쳐 민다나오 지역에서 신인민군을 거의 전멸시킨 것은 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인민군이 가진 취약점 그리고 잘못된 결정에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고 항상 말해왔다.

지난 20년동안, 카 오리스와 다른 동지들은 북동 민다나오 지역에서 당과 신인민군 그리고 혁명군을 이끌었다. 신인민군이 대규모의 집중적인 게릴라전을 펼침에 따라 민다나오 섬 내 5개 지역에 걸쳐 더욱더 깊어지고 확대되는 대중적 기지에 기반한 인민전쟁이 보다 더 격렬해질 것이다.

2015년에, 카 오리스는 민다나오 섬에서 인민전쟁을 벌였던 공로를 인정받아 신인민군의 전국작전지휘부의 주요 지휘관 가운데 한명으로 임명되었다. 2016년에는 필리핀 전역의 모든 지역 당 위원회로부터 약 100명의 간부를 모아 역사적인 필리핀 공산당 제2차 총회를 소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대회 기간동안, 카 오리스는 중앙위원회, 정치국, 집행위원회의 성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민다나오 위원회와 군사 위원회에서 주요 간부가 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그는 평화 협상에서의 국민민주전선의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당의 지도자로서, 카 오리스는 맑스주의-레닌주의-마오주의에 대해 학습하고 이를 확고하게 적용했다. 그는 특히 보응우옌잡, 호치민, 마오쩌둥과 같은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고전 군사 저작들을 읽고 또 다시 읽는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반식민지, 반봉건주의 국가에서 벌어진 인민전쟁의 성공적 경험과 역사에 대해서도 그는 꼼꼼하게 연구했다. 카 오리스는 역사를 통해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계급의 서사적 투쟁에 항상 영감을 받곤 했다.

그는 게릴라전의 기술과 과학적인 측면에서 젊은 간부들과 붉은 전사들을 훈련시키는데 시간과 노력을 바쳤다. 한편 게릴라전을 통해 풍부하게 얻게 된 과거와 현재의 경험들을 통해, 신인민군 장병과 장교들을 위한 매뉴얼과 훈련코스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크고 작은 회의에서 당 간부들을 모아 동지들과 함께 경청하고,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한 게릴라 전선에서 다른 전선으로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신인민군 부대와 당 위원회의 활동을 직접 지켜봤다. 지난 몇 년동안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인민전쟁을 벌이는데 대한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고 이를 고취시켰다. 카 오리스는 강도높은 군사 작전 가운데서 간부들을 모으고 그들의 혁명적 활동들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항상 대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카 오리스는 환경에 대해서는 확고한 옹호자였다. 그가 활동가로서 조직했던 첫번째 시위는 벌목 기업에 대한 반대 행동이었다. 수 십년동안 그는 환경을 파괴하는 거대 부르주아 매판 기업에 맞서 싸웠던 신인민군의 부대를 이끌어왔다. 매년 지구의 날에는 성명을 발행하면서 특히 무정부주의적인 자본의 생산과 그것이 불러올 파괴적 여파와 지구 생태계에 끼칠 영향으로 인해, 기후위기가 악화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벌목과 광업 기업들이 대중과 토지를 착취하고 파괴하면서 기계와 도구들을 쓸 수 없게 만드는 신인민군의 활동을 지지했다.

카 오리스는 공개적인 영역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했었다. 그는 1986년에서 1987년까지 이어졌던 코라손 아키노 정부와의 평화협상에서 민족민주전선(NDF) 민다나오 대표 중 한명으로 배치되었다. 카 오리스는 민다나오 국민민주전선 대변인을 맡았으며 이후에는 신인민군 대변인을 맡았다. 그는 '오리스' 라는 이름을, 3살때부터 자신을 길러준 삼촌이자 양아버지인 마우리시오 로벨로에서 따왔다. 카 오리스는 1978년에 봄보 라디오에서 '카 오리스'라는 이름으로는 처음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한다.

대변인을 지낸 후, 카 오리스는 언론인들과 수많은 만남을 가졌다. 그에겐 상당히 많은 기자와 작가들을 친구로 두었는데, 가능하다면 언제든지 인터뷰를 수락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혁명적 대의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는 이들에게도 살갑게 대할 정도로 항상 친절했던 덕분이었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향한 투쟁을 열렬히 지지했다. 카 오리스의 노력을 통해 적지 않은 언론인들이 혁명운동이 파시스트 반동분자들에 의해 입혀지고 있는 "테러리스트들"이라는 이미지와 얼마나 다른 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대중들에게 다가가 혁명운동에 대한 명확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자들을 토론에 참여하게 했다. 카 오리스가 마련한 기자회견에 참석할 기회를 얻은 기자들은 그의 카리스마와 겸손함, 모두를 증언할 것이다.

사실 그의 대중적이고 조직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카 오리스는 편한 삶이 아닌 당 간부이자 게릴라 투사로서 힘들고 고된 삶을 선택한 겸손한 혁명가로 남아있다. 그는 꼼꼼하고 엄격하게 청결한 생활방식을 유지함으로써 영구적으로 손상된 방광(옥중생활 중 감염되었으나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결과)을 관리할 수 있었다. 카 오리스는 자신이 병들고 아프다는 군의 거듭된 주장을 비웃었다. 그는 대체로 건강을 유지했고 심지어 지난 몇 달동안 이어진 게릴라전에서 적들의 격렬한 작전에도 불구하고 며칠동안 계속해서 행군할 수 있었다. 젊은 붉은 전사들과 혁명가들은 건강상태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인민전쟁이라는 험난한 길을 계속해서 걸어왔다는 점에서 항상 카 오리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카 오리스는 전형적으로 가정적인 남성으로, 그의 아내인 카 마리아 말라야와 두 자녀들에게 매우 헌신적이었다. 많은 혁명가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오랜 분열의 시기를 견뎌왔다. 카 오리스는 당의 지도자인 카 마리아를 가장 존경했다.

카 오리스는 동지들, 특히 젊은 동지들을 따뜻한 애정으로 대했다. 그에겐 동지들과 대중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관심이 있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풍자성 짙은 그의 유머 센스 덕분에 다른 이들과 친해지는 것도 쉬웠다. 카 오리스는 붉은 전사들, 농민 계층, 루마드족, 노동자들을 비롯한 도시의 다양한 영역에서 사랑받는 동지였다. 많은 이들에게 그는, 동지들의 크고 작은 고민에도 관심을 가진 다정한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카 오리스를 향한 폭넓은 노동자, 농민 계층의 사랑은 대지주들, 거대 매판 자본, 광업 기업, 대규모 상업 농장, 관료 자본주의자들, 독재자와 폭군들 그리고 착취와 억압의 체제를 영속시키는 파시스트 테러리스트들의 증오와도 일치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부와 자원을 카 오리스의 이미지를 악마화하고 어둡게 만드는데 사용했다. 비겁하고 비열한 파시시트들이 카 오리스를 살해한 것을 축하하는 것은 이미 정도를 넘어 선지 오래다. 그들은 카 오리스를 살해한다면 혁명은 종식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뿐이다. 카 오리스가 말했듯 혁명은 그 자체로 정의롭기 때문에 계속될 것이다.

파시스트들은 카 오리스의 목숨을 앗아 감으로써 카 오리스라는 이름을 영원히 남기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그는 이제 영웅이자 우상 가운데 하나로 필리핀 민중들의 마음과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 그가 가졌던 불굴의 혁명적 저항 정신은 젊은 붉은 전사들과 새로운 세대의 당 간부들에게 계속해서 스며들고 있다. 이는 진정한 민중의 자유와 사회 해방, 땅이 없는 이들과 산업화를 위한 토지 그리고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민중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해 나갈 다음 세대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카 오리스에 대한 기억이여 영원하라!

맑스주의-레닌주의-마오주의의 횃불을 높이 들자!

민중민주혁명의 대의를 전진시키자!
완전한 승리가 찾아올 때까지 인민전쟁을 이어 나가자!

신인민군이여 영원하라!

필리핀 공산당이여 영원하라!

필리핀 민중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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